독보적인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Nike)
이런 브랜드도 매우 초라한 무명 시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 나이키 (Nike)의 공동 창업자이자 그 전엔 미국 오리건 대학의 육상팀 선수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어 왔는데요.
혹시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를 들어 보셨나요?
나이키 (Nike)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거로 생각하는데요.
오리건 대학 육상팀에 있던 필 나이트는 당시 미국 운동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의 스승이었던 빌 바우어만에게 동업 제안을 하게 됩니다. 필 나이트는 독일제 보다 성능이 뛰어나면서 가성비가 좋은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빌 바우어만 역시 평소 신발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 둘은 각각 500달러를 투자해 현재 나이키 (Nike)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를 1964년에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필 나이트는 창업론 강의를 들으며 '앙트레프레너십 (entrepreneurship)'의 과제로 신발 산업에 대한 에세이를 제출하게 되었는데요, 육상선수였던 그는 일본의 러닝화가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필 나이트는 일본 운동화 제조업체인 오니츠카 타이거 (현재 아식스)를 알게 되었고 극적으로 미팅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필 나이트는 스탠퍼드에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에세이를 그대로 발표했는데요, 이 발표를 위해 시장조사와 무역은 물론 논어, 성경, 불교 경전, 탈무드까지 공부했고 이에 기반한 인문학적인 생각의 뿌리를 드러내며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에서 오니츠카 타이거의 신발을 유통할 수 있게 됩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해마다 매출이 증가하여 1969년에는 3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오니츠카 타이거는 더 경쟁력 있는 미국 내 유통업자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1971년 계약을 마무리하며 관계가 종료됩니다.
오니츠카 타이거와의 결별 후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의 창업주였던 필 나이트는 자체적으로 신발을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그는 새 출발을 위한 브랜드 이름과 로고를 고민하게 됩니다.
우선 '나이키 (Nike)'라는 브랜드명은 당시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의 첫 번째 정직원이었던 제프 존슨의 꿈에 나타난 승리의 여신, 니케 (NIKE)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이키 (Nike) 로고인 스우시 (Swoosh) 디자인은 필 나이트가 당시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그래픽 아트 디자인을 전공하던 대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단돈 35달러를 주고 의뢰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단순하고 부드럽고 동적인 느낌이 전달되지만 아디다스와는 전혀 다른 로고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필 나이트는 캐롤린 데이비슨의 아이디어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로고가 빨리 결정되지 않으면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실제로 이렇게 언급을 하게 됩니다.
별로지만 보면 볼수록 좋아질 것 같다
I don't love it, but I think it will grow on me
스우시 (Swoosh) 로고가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의 날개를 형상화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은 선수들이 뛰는 육상 트랙의 코너 모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는 나이키 (Nike)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후 나이키 (Nike)는 스우시 (Swoosh) 로고를 바탕으로 다양한 제품을 연구 & 개발하였으며, 제품력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마케팅까지 더해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스포츠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나갔습니다.
나이키가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가 되면서 필 나이트는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감사를 표하게 되는데 나이키 (Nike) 스우시 (Swoosh) 로고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와 나이키 주식 500주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나이키 (Nike)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1980년대는 미국에서 에어로빅이 선풍적인 붐을 이루고 있을 때였죠.
당시 시장점유율이 나이키 (Nike)의 10분의 1 수준이었던 리복 (Reebok)이 에어로빅 시장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나이키 (Nike)는 에어로빅이라는 장르를 무시하면서 안일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요.
아줌마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것은 피트니스지 스포츠가 아니다
리복 (Reebok)은 '프리스타일'이라는 하이탑 신발을 내놓으면서 곧바로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리복 (Reebok)은 이 신발 하나로 시장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었고, 3년 후인 1987년에는 나이키 (Nike)의 점유율을 두 배가량 앞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리복 (Reebok)의 성공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프리스타일' 후로 다른 경쟁사들이 비슷한 신발들을 내놓으면서 리복 (Reebok)의 매출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하이탑' 신발의 유행이 지나가는 사이 나이키 (Nike)에서 주도한 '하이테크' 신발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나이키 (Nike)는 NASA의 직원이었던 프랭크 루디와 함께 압력을 가해도 모양이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에어 쿠셔닝 기술을 개발하면서 1979년 이 에어 쿠셔닝 기술이 최초 적용된 테일윈드를 출시하게 되고, 1982년에는 에어 쿠셔닝 기술이 적용된 최초의 농구화 에어 포스 원을 개발하게 됩니다.
나이키 (Nike)의 전략은 바로 초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껍질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Just Do It
"Just Do It"의 탄생 비화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요.
1988년 필 나이트가 나이키를 좀 더 알리기 위해 위든 앤드 케네디라는 광고 회사에 광고를 의뢰하게 됩니다.
광고 회사 대표였던 위든이 나이키 (Nike) 광고를 고민하던 중에 당시 개리 길모어라는 사형수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형 집행 의자에 앉은 개리 길모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Let's Do It
"주저하지 말고 얼른 날 죽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이 말이 미국 전역을 유행하면서 티셔츠까지 만들어지는 상황이었죠.
광고에 미쳐있던 위든 역시 이를 놓치지 않고 개리 길모어의 말을 이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Let's Do It"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 찝찝했는지 'Let's'를 'Just'로 바꾸면서 현재의 나이키 (Nike) 슬로건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스포츠에 대한 리스펙 하나로 지금의 나이키 (Nike)를 만든 빌 바우어만과 그의 제자 필 나이트.
틈새시장을 보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노력은 분명히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기업의 철학이나 소비자의 니즈보다 우선시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다움'을 잃어비린 채 트렌드만 추종하다보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껍질'을 바꾸기에 앞서, 브랜드의 '본질'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자기다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루어지는 브랜드, 나이키 (Nik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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